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모델 (문단 편집) ==== 서부전선의 재건 ==== >우리는 룬트슈테트 원수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공로자는 프로이센 사람- 지난 여름 비스툴라 강에서 소련군을 저지한 뒤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 재건을 위해 부임한 발터 모델 원수였다'''. 적장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지략가였던 모델이 국방군의 참패를 막아냈다. >그는 패닉을 진정시키고, 사기가 꺾인 독일군을 효율적인 전투 집단으로 재편성했다. 앤트워프에서 남쪽으로 260마일 떨어진 에피날까지, 모델은 기적적으로 독일군에 새로운 척추를 이식했다. >---- >[[오마 브래들리]] 원수 《[[라이프(잡지)|LIFE]]》 1951년 4월 23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독일군의 퇴각을 무질서한 패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점령지를 축소하면서 주둔 병력을 서부 방벽으로 이동시켜 다시금 전선을 구축한 독일군 방어 전략이 성과를 거둔 것이었으며 당시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조차도 1944년 9월 29일자 서한에서 >"독일군이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전선을 완성시켰다." 고 결론을 내렸다. Joachim Ludewig의 저서인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에 따르면 모델이 총사령관에 부임하기 전의 서부전선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웠으나, 룬트슈테트와 달리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모델의 모습은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조차 장병들의 사기를 고조시켰으며, 특히 G군집단[* Armeegruppe G. 9월 중순 이후 G집단군(Heersgruppe G)으로 개편되었다.] 사령관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Johannes Blaskowitz) 상급대장에게 최대한의 지휘 권한을 부여하고, 총통 직할 명령들을 교묘하게 무시하며, [[하인리히 힘러]]의 개입[* 당시 보충군 사령관이었던 힘러는 1939년 [[폴란드 침공|폴란드 전역]]에서 행한 친위대의 인종 범죄를 정면에서 비난한 블라스코비츠를 블랙 리스트에 올려 놓았기에 서부전선 총사령부가 요청한 대부분의 장비와 병력을 친위대에 독점시켰고, SD로 하여금 국방군 장교들을 연행하려다가 이를 가로막는 발터 모델과 사사건건 충돌했다.]을 배제시키고, B집단군과의 연계 지점에 증원 부대를 투입하여 결과적으로 G군집단 185,000명을 무사히 퇴각시킨 것은 노르망디 상륙 당시 거듭 혼선을 빚었던 서부전선 지휘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모델은 OB West 부임 이후 블라스코비츠와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조차 거의 두절된 상황에서 대규모 연계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베르너 폰 프리치와 [[루트비히 베크]]가 물러나면서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좌천된 모델이 드레스덴의 4군단으로 전임되었을 때 상위 제대인 3집단군 사령관이 블라스코비츠였고, 같은 루터교회 신자였던 그가 모델을 많이 챙겨주면서[* 작센 주의 명문 귀족 출신인 마이센 가문이 모델 부부를 식사에 자주 초대하는 등 고급 장교로서 지역 사회와 관련된 사회적인 의무 수행을 블라스코비츠가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모델은 자택에 머물렀던 짧은 기간 동안 드레스덴 시에서 개최하는 문화 행사와 자선 행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두 사람의 가족들도 친하게 지내왔던 오랜 인연 등으로 인해 서로 매우 잘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4년 8월 26일, 모델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려 8년 연상의 선배 장성을 '너의 친구 블라스코'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행운이 그와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파일:img024_1944.jpg|width=300]] ||서부전선 총사령관을 겸임하던 시기의 이 사진은 현재 두 가지 판본이 공개되어 있다. 귄터 라이히헬름이 소장했고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 및 데릭 S. 점브로 박사에게 제공된 사진은 모델의 서명이 연필로, 이름만 기입되어 있고 아들인 한스게오르크 모델이 소장하고 있었던 본 사진만은 펜으로 날짜와 이름이 모두 서명되어 있다. 1945년 3월, 모델이 아들의 생일 즈음에 보내준 사진이다.|| 1944년 9월에는 영•미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재편성 중이던 [[빌헬름 비트리히]]의 제 2 SS기갑군단을 즉시 투입시키고 3시간 만에 방어선을 구축, 아른헴을 방어하고 작전을 분쇄하는 데 공훈을 세웠다. 제9 SS기갑사단의 사단장 대리였던 발터 하르처 SS중령이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의 정예 부대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라고 회고했으니 그야말로 발터 모델이 방어전의 1인자임을 공고히 한 전투였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전만 거듭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고 한다.[* Samuel W. Mitcham은 모델의 전적이 연합군, 심지어 논픽션 작가들과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도 폄하되고 있다며 그가 친나치이건 아니건 마켓 가든 작전은 발터 모델이 승자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명장 [[오마 브래들리]]와 코트니 하지스가 지휘하는 미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써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연합군 측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미국의 오마 브래들리에게 승리를 거둔 장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르제프 전역의 소련군 참전 용사들이 르제프를 '''고기분쇄기'''(Meatgrinder)라고 회상할 만큼 소련군의 출혈이 컸으며 주민들은 "4차례의 대규모 작전이 르제프에서 실행되었으나 전부 실패했다. [[대조국전쟁]]의 최악의 군사적 실패는 르제프 전역이라는 이유로 정부는 르제프에서의 희생을 간과하고 있다."며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또한 휘르트겐 숲 전투는 '''생지옥''' 또는 '''마녀의 숲'''이라 불리며 미군이 가장 긴 시간 치러야 했던 단일 규모의 전투가 되었고, 최대급의 패배였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전사에서도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 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및 재조정한 후 밀착 방어선을 형성한 당시 독일군의 전과를 '''서부 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 Miracle At The West Wall)이라 기록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